임신한 몸으로 능욕당하고, 남편이 손수 나를 죽였다. 죽음의 원한을 품고 돌아온 나는 악연을 베고 복수의 칼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몰랐던 한가지 사실 나는 이 나라 태후의 친딸이란걸… … “세자, 선주와 혼인하고 싶으시다고요?” “그건 안 됩니다. 세자는 원래 지영이와 정혼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놀란 목소리가 대전 안에서 울려 퍼지자 유지영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목소리를 들으니 전생에 그녀와 한 이불을 덮고 살았던 배준형이 분명했다. 준수한 외모에 온화한 성격까지, 그는 경성의 뭇 여인들이 꿈에도 그리는 신랑감이었다. 전생 둘은 유지영의 성년식이 마치자마자 바로 혼약을 정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지금 배준형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유선주와 혼인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유지영은 그 순간 배준형도 회귀했음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또 한 번의 기회가 생긴 지금, 그녀는 저 가식적인 가면을 벗기고 그의 날개를 꺾어 지옥으로 떨어뜨리리라 다짐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유지영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유씨 집안의 적장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생모는 궁중에 계신 서 태후였다. 그동안 유씨 집안이 인주에 거주했던 이유는 태후가 유지영의 출생의 비밀이 알려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전생의 황제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친왕의 자손들 중에서 자질이 높은 자를 골라 태자에 책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배준형은 태후의 간택을 받았다. 그가 잘나서가 아니라 단지 유지영의 부군이기 때문이었다. 유지영은 손뼉을 치며 문지방을 넘어 안으로 들어섰다. “지영이?” 집안의 둘째 며느리인 송씨는 눈시울을 붉히며 유지영을 바라보더니 다가와 난감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사람들 앞에서 송씨는 친딸인 유선주보다 유지영을 더 아끼는 것처럼 연기하며 인자하고 선하다는 명성을 쌓았다. “숙모님.” 유지영은 담담히 손을 빼고는 배준형을 돌아보며 말했다. “조금 전에 세자께서 하신 말씀은 다 들었습니다. 세자께서 선주를 연모하시어 혼인하고 싶다 하셨는데, 숙모님은 어찌하여 굳이 저를 엮는 건가요?” 배준형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와 선주는 서로 연모하는 사이다. 지영이 너는 언니로서 동생을 축복할 줄도 알아야지, 괜한 시기심에 선주를 원망하지 말거라.” 전생에 그는 다른 여인에게 조금만 다정하게 굴어도 시샘하고 불만을 퍼붓는 유지영을 보곤 했다. 처음에는 어린 마음에 신선하고 귀엽다고 느꼈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녀에게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세자들은 모두 자식을 보았는데 홀로 후사를 보지 못하여 경성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지영아, 홧김에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유씨 집안의 적장녀는 너이지 않니. 너도 세자와의 혼인만 손꼽아 기다리는 걸 온 집안이 아는데 선주가 어찌 네 사람을 가로채겠어.” 그 순간 배준형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진 것이 보였다. “가서 둘째 아가씨를 모셔오너라!” 송씨는 속으로는 기뻐하면서도, 겉으로는 성이 난 척 유지영의 자존심을 짓밟고, 모두에게 그녀가 수치심도 모르고 제 것이 아닌 사람을 탐낸다고 전했다. “숙모님!” “제가 언제 정왕 세자와의 혼인을 손꼽아 바란다고 말한 적 있나요? 조금 전에 이미 명확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세자께서 선주를 연모하여 혼인하고 싶으시다는데 그게 저와 대체 무슨 상관이죠?” “지영아, 홧김에라도 그런 말은 하면 안 되지.” “제 거절이 숙모님께는 홧김에 한 말로 들렸나 보군요. 숙모님은 절 수치도 모르는 파렴치한 사람으로 만들 속셈인가요?” 송씨가 흠칫하더니 당황한 눈으로 유지영에게 소리쳤다. “지영아, 어찌 웃어른에게 예의 없이 그런 식으로 말하느냐!” 배준형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훈계하듯 말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세자께서 갑자기 혼약을 바꾸고 싶다 하시니, 지영이가 많이 당황했나 봅니다.” 이때 유선주가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하늘거리는 흰 비단치마를 입은 청순한 얼굴의 단아한 미인이었다. “세자와 어머니를 뵙습니다.” “마침 잘 왔다. 어서 너는 세자와 혼인할 마음이 없다고, 이 혼사는 원래부터 지영이의 것이었다고 말하거라.” 송씨는 일부러 언성을 높이며 근엄한 척 말했다. 유선주는 눈시울을 확 붉히더니 애처롭게 유지영과 배준형을 번갈아 보았다. “어서 말하라는데도! 절대 지영이의 세자비 자리를 빼앗지 않겠다고!” 배준형은 혐오스럽다는 듯이 유지영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네가 무슨 짓을 벌이더라도 난 절대 너와 혼인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마음엔 오로지 선주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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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사이, 신예린은 믿기 힘들게도 대학의 새 교수님과 하룻밤을 보내고 말았다! 다음 날, 교수님은 신예린을 교실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차가운 손이 넉넉한 교복 안으로 스며들더니 신예린의 아랫배를 따라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교수님의 뜨겁게 달아오른 손끝이 피부를 스치자, 신예린은 참지 못하고 신음을 냈다. “아... 교수님, 안 돼요...” 교수님은 몸을 낮춰 신예린의 귀에 입을 맞추며 낮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우리 자기야, 내 이름을 불러줘... 아니면 날 남편이라고 불러도 좋아.” “읍.” 방문이 열리더니 두 사람이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취기 가득한 얼굴로 현관에서 키스를 나누었고 거친 숨소리와 야릇한 분위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아.” 남자에게 안기게 된 신예린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작고 여린 신예린이 건장한 남자에게 안겨 있는 모습은 사람들의 음심을 자극했다. 그들은 곧장 침대로 향했다. 신예린은 침대 위로 옮겨졌고 거대한 몸이 그녀를 깔아뭉갰다. 남자의 눈꼬리가 빨갰다. 지금 이 순간, 평소 절제미가 느껴졌던 그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다. 이성의 끈을 놓은 모습이었다. 신예린은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침대 시트를 힘주어 꽉 쥐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빛났다. 흔들리는 불빛 아래, 그들의 가쁜 숨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 “예린아.” “예린아!” 신예린은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또다시 그 꿈을 꾸게 되었다. 벌써 한 달이나 지났는데도 매일 밤 그 장면이 꿈에 나왔다. 그날은 여도준의 생일날이었다. 신예린은 신나게 그 남자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갔다가, 그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신예린은 뜻하지 않게 낯선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다음 날 눈을 떠보니 그 하룻밤 상대가 바로 자신의 새 교수님인 주시우라는 것을 알게 된다! 더 충격적인 건, 자신이 주시우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신예린을 보더니 주시우는 결혼을 제안한다. 그리하여 신예린은 이렇게 엉뚱한 우연 속에서 자신의 교수와 비밀리에 결혼하게 된다. “예린아, 무슨 생각하는 거야? 학교 늦겠어.” 눈앞에 있는 남자의 다정한 목소리에 신예린은 현실로 돌아온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꿈을 떠올리며 신예린은 주시우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서둘러 일어나 모든 것을 정리한 뒤 주시우와 함께 집을 나선다. ... 수업 시간. “예린아, 어때? 교수님이랑 동거하는 느낌 어땠냐고!” 송지유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 신예린의 결혼 사실을 아는 사람은 신예린의 친구 송지유뿐이었다. “무슨 느낌?” 신예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교수님이랑 같이 잤잖아! 같이 자니까... 안아봤을 거 아니야! 교수님 완전 포근하게 생겼잖아! 어땠는지 빨리 말해봐!” 신예린은 순간 만두를 목에 걸릴 뻔했다. 귀까지 달아오른 채 황급히 말했다. “우리 따로 잤거든?” “뭐? 뭐라고?” 송지유는 따져 물었다. “따로 잤다는 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각방 썼어!” 송지유는 혀를 차며 소리 질렀다. “정상적인 남자가 어떻게 유혹을 이겨낼 수 있겠어. 지금 보니 이유는 두 가지뿐이야. 하나는 그 방면에서 안 된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 거지.” “그럼 교수님이 안 되는 건지, 사랑하지 않는 건지 어떻게 알 수 있지?” “그러면... 교수님을 살짝 유혹해 보는 건 어때?” “뭐?!” 밤. 신예린은 욕실에 서서 낮에 송지유가 제안한 계획을 곱씹고 있었다. 몇 분간 심리적 갈등을 겪은 후, 신예린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옆에 있던 투명 잠옷을 집어 들었다. ... 주시우가 집에 돌아와 문을 열었지만, 집 안은 조용했고 욕실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시우는 손을 들어 욕실 문을 두드렸다. “예린아, 나 왔어.” 몇 초가 지나도 반응이 없자, 주시우는 다시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예린아, 괜찮아?” 그러자 신예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수님, 속옷을 깜빡했어요. 대신 가져다주실 수 있나요? 제가 좀 불편해서... 그냥 들어오시면 돼요.” 순간 얼어붙은 주시우는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신예린이 숨이 막힐까 봐 걱정되어 주시우는 눈을 감고 속옷을 들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예린아, 속옷... 여기 있어.” 주시우는 눈을 감은 채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욕실 안은 오래도록 조용했고, 손에 든 속옷도 움직이지 않았다. 점점 걱정이 커진 주시우가 눈을 감고 있던 손을 떼는 순간, 그 자리에 멍해졌다. 눈앞에는 아름다운 신예린이 투명 잠옷을 입고 서 있었다. 신예린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길고 하얀 다리가 잠옷 아래로 은은하게 드러나 있었다. 주시우는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 순간 신예린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교수님, 저... 예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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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한 몸으로 능욕당하고, 남편이 손수 나를 죽였다. 죽음의 원한을 품고 돌아온 나는 악연을 베고 복수의 칼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몰랐던 한가지 사실 나는 이 나라 태후의 친딸이란걸… … “세자, 선주와 혼인하고 싶으시다고요?” “그건 안 됩니다. 세자는 원래 지영이와 정혼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놀란 목소리가 대전 안에서 울려 퍼지자 유지영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목소리를 들으니 전생에 그녀와 한 이불을 덮고 살았던 배준형이 분명했다. 준수한 외모에 온화한 성격까지, 그는 경성의 뭇 여인들이 꿈에도 그리는 신랑감이었다. 전생 둘은 유지영의 성년식이 마치자마자 바로 혼약을 정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지금 배준형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유선주와 혼인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유지영은 그 순간 배준형도 회귀했음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또 한 번의 기회가 생긴 지금, 그녀는 저 가식적인 가면을 벗기고 그의 날개를 꺾어 지옥으로 떨어뜨리리라 다짐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유지영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유씨 집안의 적장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생모는 궁중에 계신 서 태후였다. 그동안 유씨 집안이 인주에 거주했던 이유는 태후가 유지영의 출생의 비밀이 알려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전생의 황제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친왕의 자손들 중에서 자질이 높은 자를 골라 태자에 책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배준형은 태후의 간택을 받았다. 그가 잘나서가 아니라 단지 유지영의 부군이기 때문이었다. 유지영은 손뼉을 치며 문지방을 넘어 안으로 들어섰다. “지영이?” 집안의 둘째 며느리인 송씨는 눈시울을 붉히며 유지영을 바라보더니 다가와 난감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사람들 앞에서 송씨는 친딸인 유선주보다 유지영을 더 아끼는 것처럼 연기하며 인자하고 선하다는 명성을 쌓았다. “숙모님.” 유지영은 담담히 손을 빼고는 배준형을 돌아보며 말했다. “조금 전에 세자께서 하신 말씀은 다 들었습니다. 세자께서 선주를 연모하시어 혼인하고 싶다 하셨는데, 숙모님은 어찌하여 굳이 저를 엮는 건가요?” 배준형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와 선주는 서로 연모하는 사이다. 지영이 너는 언니로서 동생을 축복할 줄도 알아야지, 괜한 시기심에 선주를 원망하지 말거라.” 전생에 그는 다른 여인에게 조금만 다정하게 굴어도 시샘하고 불만을 퍼붓는 유지영을 보곤 했다. 처음에는 어린 마음에 신선하고 귀엽다고 느꼈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녀에게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세자들은 모두 자식을 보았는데 홀로 후사를 보지 못하여 경성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지영아, 홧김에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유씨 집안의 적장녀는 너이지 않니. 너도 세자와의 혼인만 손꼽아 기다리는 걸 온 집안이 아는데 선주가 어찌 네 사람을 가로채겠어.” 그 순간 배준형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진 것이 보였다. “가서 둘째 아가씨를 모셔오너라!” 송씨는 속으로는 기뻐하면서도, 겉으로는 성이 난 척 유지영의 자존심을 짓밟고, 모두에게 그녀가 수치심도 모르고 제 것이 아닌 사람을 탐낸다고 전했다. “숙모님!” “제가 언제 정왕 세자와의 혼인을 손꼽아 바란다고 말한 적 있나요? 조금 전에 이미 명확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세자께서 선주를 연모하여 혼인하고 싶으시다는데 그게 저와 대체 무슨 상관이죠?” “지영아, 홧김에라도 그런 말은 하면 안 되지.” “제 거절이 숙모님께는 홧김에 한 말로 들렸나 보군요. 숙모님은 절 수치도 모르는 파렴치한 사람으로 만들 속셈인가요?” 송씨가 흠칫하더니 당황한 눈으로 유지영에게 소리쳤다. “지영아, 어찌 웃어른에게 예의 없이 그런 식으로 말하느냐!” 배준형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훈계하듯 말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세자께서 갑자기 혼약을 바꾸고 싶다 하시니, 지영이가 많이 당황했나 봅니다.” 이때 유선주가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하늘거리는 흰 비단치마를 입은 청순한 얼굴의 단아한 미인이었다. “세자와 어머니를 뵙습니다.” “마침 잘 왔다. 어서 너는 세자와 혼인할 마음이 없다고, 이 혼사는 원래부터 지영이의 것이었다고 말하거라.” 송씨는 일부러 언성을 높이며 근엄한 척 말했다. 유선주는 눈시울을 확 붉히더니 애처롭게 유지영과 배준형을 번갈아 보았다. “어서 말하라는데도! 절대 지영이의 세자비 자리를 빼앗지 않겠다고!” 배준형은 혐오스럽다는 듯이 유지영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네가 무슨 짓을 벌이더라도 난 절대 너와 혼인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마음엔 오로지 선주뿐이야.”
모두가 금욕적인 대장군이라 믿었지만,그는 내게만 집착하는 미친놈이었다. 그의 혼사가 정해지고 도망치던 밤 그가 내 손목을 움켜쥐며 말했다. “어딜 도망치려고? 넌 내 거야.” … 강유영은 치맛자락을 들고서 처마 길을 따라 뒤뜰을 나오고 있었다. 온몸에 퍼진 근육통 때문에 걸음걸이가 다소 어색했다. 좌측 쪽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커다란 손이 뻗어 나와 가늘고 여린 그녀의 허리를 가로챘다. “나다.” 익숙한 감송향이 코끝에 닿자, 강유영은 고개를 들고 자신을 안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높게 솟은 날카로운 콧날과, 윤기가 도는 얇은 입술, 요염하다는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빼어난 이목구비와 가지런하게 틀어 올린 머리, 분명히 얼굴은 귀하게 자란 귀공자인데,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강한 위압감이 풍겼다. 사내의 이름은 조원철. 강유영의 큰 오라버니이자, 변방에서 5년간 나라를 지키다가 반달 전에야 개선가를 울리며 귀경한 대장군이었다. 조원철은 그녀를 놓아주고도 바로 물러서지 않고 시선을 내려 지그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전장에 몸을 담았던 사람이라, 풍기는 위압감이 숨이 막혔다. 그저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는데도 감히 눈을 마주칠 수 없게 만드는 위엄이 느껴졌다. 까만 머리와 대조되는 하얗고 고운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물기를 머금은 두 눈은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그녀는 마치 놀란 토끼마냥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오라버니….” 강유영은 떨리는 가슴을 애써 달래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불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지만 등 뒤에는 차가운 담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조원철은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의 체취가 압도하듯 그녀를 감쌌다. 준수한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길고 풍성한 속눈썹 아래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까지 선명히 볼 수 있었다. 강유영의 마음은 또다시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등을 벽에 바짝 붙였다. 두 손은 무의식적으로 뭔가를 잡고 싶어 안달이 났고, 가슴에서 전해지는 떨림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들고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자꾸만 어젯밤을 떠올리게 했다. 조원철은 말없이 손을 뻗었다. 바짝 긴장한 그녀와는 대조되게, 그는 느긋하게 품에서 백옥 약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오라버니, 뭘 하시려는 건가요?” “약 발라야지.” 조원철은 당연하다는 듯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 그럴 필요까지는….” 강유영은 얼굴이 화끈거려 당장 어디라도 들어가서 숨고 싶었다. 그녀는 당황한 듯, 두 손을 저으며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얇은 천 사이로 전해지는 그의 체온이 뜨거워, 이마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녀와 조원철은 피가 섞인 남매가 아니었다. 강유영이 여덟 살 나던 해, 국공부는 친딸을 찾았다며 조연화를 집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강유영이 누군지는 알려주지 않고 단지 그녀가 강씨라는 것만 전해주었다. 그날 이후로 강유영은 조유영에서 스스로 강유영이 되었다. 그래도 장남인 조원철이 강직하고 공정한 사람이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품이었다. 강유영은 그 덕분에 많은 고초를 면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에게 남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감히 뭔가를 바라지는 못하고 그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멀리서 바라볼 뿐이었다. 어젯밤, 술을 많이 마신 조원철이 걱정되어 직접 끓인 숙취 해소탕을 들고 그를 찾아갔었다. 그런데 술에 취할 대로 취한 조원철이 그녀를 누구로 착각한 것인지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다정한 목소리로 ‘내 사랑’이라 부르며 몸을 밀착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무도 잠 못드는 밤이 이어졌다. 그는 마치 뜨거운 불길처럼 온몸으로 그녀를 감쌌다. 평소의 냉담하고 금욕적인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술에 취한 사람은 정말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동이 틀 때까지 그에게 시달리며 몸이 산산조각 날 것 같은 고통을 겪었다. 강유영은 날이 밝기 전에 쑤시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처소로 돌아와 겨우 치마만 갈아입고 사당으로 향해야 했다. 그녀가 잠깐 넋을 놓은 사이, 허리는 이미 큰 손에 잡혀 있었다. 조원철은 능숙하게 허리띠를 잡아당겨 풀었다.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허리춤이 갑자기 헐렁해지더니 치마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하얗고 보드라운 살결이 드러나고, 곳곳에 남은 붉은 흔적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조원철의 숨결이 거칠어지고 청명하던 눈빛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숙였다. “오라버니….”
“전에 결혼하자고 했던 말, 아직 유효하면 받아들일게요. 우리 결혼해요.” 구청 앞. 오늘은 강이주와 심원후가 미리 약속한 혼인신고 날이었다. 하지만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강이주는 줄곧 그 자리에 있었지만 심원후는 오지 않았다. 혼인신고를 하자고 한 사람은 심원후였고, 약속을 어긴 사람도 심원후였다. 벌써 세 번째였다. 강이주는 손에 들고 있던 대기 번호표들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나서 곧바로 오랜 앙숙인 구기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결혼 제안을 3번 거절했지만 이번에는 강이주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조금 전, 강이주는 SNS에서 한 게시물을 보았다. 심원후의 첫사랑이 올린 글이었다. 사진 속에서 심원후는 단정히 앉아 사과를 깎고 있었고, 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가 필요하기만 하면 언제나 곁에 있어 주는 사람. 이게 바로 일편단심이라는 거겠지. 내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 강이주는 입꼬리를 비틀듯 올리며 댓글을 남겼다. [와, 정말 대단하네요. 그렇게 한결같은 사람은 요즘 보기 드문데… 오래오래 잘 지켜가세요..] 이상하리만큼 강이주의 마음은 차분했다. ‘심원후... 이제 정말 필요 없어.’ 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던 강이주의 생각을 끊었다. [현재 출장 중이라 일주일 후에 돌아갑니다. 그때도 이주 씨의 마음이 같다면, 9시에 구청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강이주는 구기빈 말속에 담긴 뜻을 모를 만큼 둔하지 않았다. “전... 기다릴게요.” 전화를 끊은 뒤, 강이주는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갔다. 강이주가 사는 곳은 도심 한가운데 있는 아파트였다. 텅 빈 공간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녀는 부동산 공인중개사에게 전화를 걸어 집을 매물로 내놓겠다고 연락했다. “네, 최대한 빨리 정리되면 됩니다.” “무슨 집이야?” 등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강이주의 몸이 굳어버렸다. 전화를 끊은 뒤, 강이주는 하루 종일 자취를 감췄던 심원후를 돌아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는 사람이 집을 내놓는다고 해서 잠깐 도와달라고 하길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이주는 심원후의 뒤에 서 있는 백초아를 보았다. 강이주의 시선이 닿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초아의 우울증이 다시 심해졌어. 집에 혼자 두기엔 불안해서 며칠 우리 집에서 지내게 했어. 손님방 좀 정리해.” “이주 씨, 혹시 불편하시면... 제가 그냥 안 오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이주 씨가 별로 내켜 하지 않는 것 같아요.” 백초아의 한마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강이주를 정확히 겨냥했다. 그 모습을 본 심원후의 얼굴이 곧바로 굳어졌다. “기분 상한 티 내는 것도 적당히 해. 초아 상태 안 좋은 거 알면서 SNS에 그런 댓글까지 달아 놓고.” “이 집의 소유권은 나한테도 있어. 누굴 들이든 그건 내 선택이기도 해. 너한테 말한 건 통보지, 네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야.” 강이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말이 연이어 쏟아지는 상황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마음대로 해.” 심원후는 아마 잊고 있을 것이다. 이 집의 명의가 강이주라는 사실을. 하지만 심원후가 백초아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강이주가 반대하는 것도 의미 없었다. 안방으로 돌아온 강이주는 샤워를 마쳤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낮은 대화를 듣고, 심원후가 안방을 백초아에게 내주었다는 걸 알았다. 그들이 같은 침대에 눕는다 해도 강이주는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차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힌 강이주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잠과 깨어 있음의 경계에서 이내 강이주는 따뜻한 품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미안해. 오늘 일부러 안 나간 건 아니야. 초아 상태가 정말 안 좋았어.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어.” “초아에게는 나밖에 없어. 초아를 혼자 두고 올 수가 없었어. 혼인신고는 조금만 미루자. 초아 상태 좋아지면 그때 가서 하면 되잖아.” 백초아 때문에 또다시 혼인신고를 미루자고 했지만, 강이주의 마음은 놀랄 만큼 잔잔했다. “너랑 백초아 일은 내가 상관할 바 아니야. 네가 뭘 하든 네 마음이니까, 나한테 설명 안 해도 돼.” “이주야.” 심원후의 목소리에 불쾌함이 묻어났다. 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강이주는 등을 돌린 자세를 유지한 채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 태도에 심원후는 결국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표정이 굳은 채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밖에서 누군가 급하게 들어오더니 뒤에서 심원후를 꽉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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