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한 몸으로 능욕당하고, 남편이 손수 나를 죽였다. 죽음의 원한을 품고 돌아온 나는 악연을 베고 복수의 칼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몰랐던 한가지 사실 나는 이 나라 태후의 친딸이란걸… … “세자, 선주와 혼인하고 싶으시다고요?” “그건 안 됩니다. 세자는 원래 지영이와 정혼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놀란 목소리가 대전 안에서 울려 퍼지자 유지영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목소리를 들으니 전생에 그녀와 한 이불을 덮고 살았던 배준형이 분명했다. 준수한 외모에 온화한 성격까지, 그는 경성의 뭇 여인들이 꿈에도 그리는 신랑감이었다. 전생 둘은 유지영의 성년식이 마치자마자 바로 혼약을 정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지금 배준형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유선주와 혼인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유지영은 그 순간 배준형도 회귀했음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또 한 번의 기회가 생긴 지금, 그녀는 저 가식적인 가면을 벗기고 그의 날개를 꺾어 지옥으로 떨어뜨리리라 다짐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유지영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유씨 집안의 적장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생모는 궁중에 계신 서 태후였다. 그동안 유씨 집안이 인주에 거주했던 이유는 태후가 유지영의 출생의 비밀이 알려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전생의 황제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친왕의 자손들 중에서 자질이 높은 자를 골라 태자에 책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배준형은 태후의 간택을 받았다. 그가 잘나서가 아니라 단지 유지영의 부군이기 때문이었다. 유지영은 손뼉을 치며 문지방을 넘어 안으로 들어섰다. “지영이?” 집안의 둘째 며느리인 송씨는 눈시울을 붉히며 유지영을 바라보더니 다가와 난감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사람들 앞에서 송씨는 친딸인 유선주보다 유지영을 더 아끼는 것처럼 연기하며 인자하고 선하다는 명성을 쌓았다. “숙모님.” 유지영은 담담히 손을 빼고는 배준형을 돌아보며 말했다. “조금 전에 세자께서 하신 말씀은 다 들었습니다. 세자께서 선주를 연모하시어 혼인하고 싶다 하셨는데, 숙모님은 어찌하여 굳이 저를 엮는 건가요?” 배준형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와 선주는 서로 연모하는 사이다. 지영이 너는 언니로서 동생을 축복할 줄도 알아야지, 괜한 시기심에 선주를 원망하지 말거라.” 전생에 그는 다른 여인에게 조금만 다정하게 굴어도 시샘하고 불만을 퍼붓는 유지영을 보곤 했다. 처음에는 어린 마음에 신선하고 귀엽다고 느꼈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녀에게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세자들은 모두 자식을 보았는데 홀로 후사를 보지 못하여 경성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지영아, 홧김에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유씨 집안의 적장녀는 너이지 않니. 너도 세자와의 혼인만 손꼽아 기다리는 걸 온 집안이 아는데 선주가 어찌 네 사람을 가로채겠어.” 그 순간 배준형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진 것이 보였다. “가서 둘째 아가씨를 모셔오너라!” 송씨는 속으로는 기뻐하면서도, 겉으로는 성이 난 척 유지영의 자존심을 짓밟고, 모두에게 그녀가 수치심도 모르고 제 것이 아닌 사람을 탐낸다고 전했다. “숙모님!” “제가 언제 정왕 세자와의 혼인을 손꼽아 바란다고 말한 적 있나요? 조금 전에 이미 명확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세자께서 선주를 연모하여 혼인하고 싶으시다는데 그게 저와 대체 무슨 상관이죠?” “지영아, 홧김에라도 그런 말은 하면 안 되지.” “제 거절이 숙모님께는 홧김에 한 말로 들렸나 보군요. 숙모님은 절 수치도 모르는 파렴치한 사람으로 만들 속셈인가요?” 송씨가 흠칫하더니 당황한 눈으로 유지영에게 소리쳤다. “지영아, 어찌 웃어른에게 예의 없이 그런 식으로 말하느냐!” 배준형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훈계하듯 말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세자께서 갑자기 혼약을 바꾸고 싶다 하시니, 지영이가 많이 당황했나 봅니다.” 이때 유선주가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하늘거리는 흰 비단치마를 입은 청순한 얼굴의 단아한 미인이었다. “세자와 어머니를 뵙습니다.” “마침 잘 왔다. 어서 너는 세자와 혼인할 마음이 없다고, 이 혼사는 원래부터 지영이의 것이었다고 말하거라.” 송씨는 일부러 언성을 높이며 근엄한 척 말했다. 유선주는 눈시울을 확 붉히더니 애처롭게 유지영과 배준형을 번갈아 보았다. “어서 말하라는데도! 절대 지영이의 세자비 자리를 빼앗지 않겠다고!” 배준형은 혐오스럽다는 듯이 유지영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네가 무슨 짓을 벌이더라도 난 절대 너와 혼인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마음엔 오로지 선주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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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을 기다린 기증 심장을 남편이 내 친부모의 양녀 윤채린에게 넘겨 이식했다. 의사는 내게 마지막으로 남은 시간이 일주일뿐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사후에 내 몸을 냉동 보존하기로 했다. 나는 내 시신을 윤채린이 일하는 연구소에 기증했다. 기증 동의서에 서명한 날, 아들 강이준이 내 품으로 뛰어들면서 엄마가 드디어 이모와 화해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부모님은 내가 드디어 자매끼리 아끼고 서로 돕는 법을 알게 됐다며 칭찬했다. 남편 강도윤은 내가 마침내 앙금을 내려놓고 사리를 분별하게 됐다며 안도했다. 나는 살짝 웃었다. 맞다. 이번에는 내가 정말 말을 잘 듣게 됐다. 나는 윤씨 집안의 친딸이라는 자리를 윤채린에게 돌려주고, 모두를 만족시켜 줄 생각이었다. 제1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남은 기간 동안 가족들과 제대로 작별하세요.” 주치의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안쓰러움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거대한 돌덩이처럼 내 심장을 짓눌렀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였다. 그래도 ‘사형 선고’를 직접 듣자, 나는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나는 겨우 스물여덟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나는 계속 버텨 왔다. 하지만 어렵게 기다린 심장 기증을 남편이 빼앗아 갈 줄은 몰랐다. 남편은 심장 기능이 조금 일찍 약해진 정도였던 가짜 딸 윤채린에게 그 심장을 이식시켰다. 나는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윤채린의 병실로 갔다. 그곳에는 내 부모님, 내 남편 강도윤, 아들 강이준이 모두 윤채린 곁에 둘러서서 살뜰히 챙기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윤채린에게 물을 먹이던 강도윤은 바로 컵을 내려놓고 다가와 물었다. “의사가 뭐래?” 내가 강도윤을 바라보자, 강도윤은 바로 죄책감 어린 눈빛으로 시선을 피했다. 이어 더듬거리듯 변명했다. “그때는 상황이 급했어. 채린이에게 심장을 이식하지 않았다면 채린이는 고통 속에서 죽었을 거야.” 엄마가 곧바로 말했다. “강 서방 말이 맞아. 세류야,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었잖니? 설마 이 정도 일로 우리에게 화낼 만큼 철이 없는 건 아니겠지?”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이 입술 앞에서 맴돌다 사라졌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화 안 났어요. 의사가 일주일 뒤에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고 했어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우리 모두에게 좋은 소식이요.” 강도윤은 콧등 위의 금테 안경을 밀어 올렸다. 안경 너머 길게 휘어진 눈매에는 바로 웃음이 번졌다. “이렇게 빨리 맞는 심장이 나온다고? 역시 그날 내 결정이 옳았어.” 아버지도 한숨을 놓으며 웃었다. “우리 채린이는 복이 있는 아이야. 심장을 채린이에게 양보하지 않았다면, 채린이는 일주일 뒤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거다.” 엄마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윤채린의 관자놀이에 흘러내린 잔머리를 부드럽게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우리 채린이 복은 이제부터 더 좋아질 거야.” “누구와는 다르게 말이야. 기다리면 다른 심장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굳이 난리를 피워서 우리 윤씨 가문 체면을 완전히 구겼지.” 나는 이미 이 사람들에게 실망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자, 내 가슴은 여전히 따끔하게 찢어졌다. 나는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래야 눈가를 뚫고 터져 나오려는 슬픔을 겨우 밀어낼 수 있었다. 강도윤은 부드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몸이 떨릴 만큼 차가웠다. “그날 그런 행동은 확실히 너무 충동적이었어. 채린이에게 사과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강도윤을 바라보았다. ‘윤채린이 내 심장을 빼앗아 갔는데, 나보고 윤채린에게 사과하라는 말인가?’ 엄마가 맞장구쳤다. “그래. 게다가 그날 네가 채린이를 괴롭히지만 않았어도 채린이가 흉통을 느낄 일은 없었어.” “채린이가 지금 이렇게 무사히 누워 있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너를 딸로 인정하지 않았을 거야.” 나는 그날을 떠올렸다. 윤채린은 내 앞에 서서 목에 남아 있는 애정의 흔적을 득의양양하게 보여 주었다. 강도윤이 자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또 얼마나 자신을 참지 못했는지 자랑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윤채린의 뺨을 때렸다가 하필 그 장면을 모두에게 들키고 말았다. 강도윤은 분노한 채 달려와 나를 밀쳐 냈다. 나는 바닥에 넘어졌고,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사이에 엄마가 달려와 나를 마구 때렸다. 아버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차갑게 서 있었다. 마치 나도 조금쯤 혼이 나야 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이어 내 심장병이 발작했다. 윤채린도 심장을 움켜쥐며 너무 아프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두는 내가 연기하는 거라고 생각했고, 윤채린만 진짜라고 믿었다. 그 기억들을 떠올리자, 나는 억지로 쓴웃음을 입가에 걸고 담담하게 말했다. “미안해. 내 잘못이야.” 내가 이렇게 순순히 사과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강도윤의 눈에는 나를 살피는 기색이 섞였다. 윤채린도 예쁜 눈썹을 찌푸리며 ‘어떻게 이렇게까지 연기를 잘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부모님도 경계하듯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내가 다시 덤벼들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 같았다. 오직 내 아들 강이준만이 기뻐하며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엄마, 다행이다. 엄마가 드디어 잘못을 인정했어.” “앞으로는 이모 괴롭히지 마. 아니면 나도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처럼 엄마 안 좋아할 거야.” 나는 고개를 숙이고 강이준을 바라보았다. 부모와 남편의 냉담함, 오해, 편애는 모두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강이준만은 달랐다. 10개월 동안 내 뱃속에 품고 낳은 내 아이가 윤채린을 더 아낀다는 사실만큼은 견딜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더 이상 다툴 힘이 없었다. 나는 가볍게 강이준의 뺨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엄마가 이준이 말 다 들을게.” 그제야 엄마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세류야, 이제야 네가 좀 말을 듣는구나.” 강도윤도 완전히 안도한 듯 말했다. “내 아내가 이제야 철이 들었네.” 애써 다정한 척하는 강도윤의 모습을 보니, 나는 가슴속에서 역겨움이 치밀었다. “아파...” 바로 그때 윤채린이 갑자기 외쳤다. 강도윤은 즉시 윤채린에게 달려갔다. 방금 전까지 나를 안고 있던 강이준도 손을 놓고 뛰어가면서 외쳤다. “이모, 어디가 아파? 이준이가 호 해 줄게.” 부모님은 눈시울까지 붉히며 윤채린을 걱정했다. 멀리 떨어져 서 있는 나는 광대 같았다. 나는 더 이상 이런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서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병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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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한 몸으로 능욕당하고, 남편이 손수 나를 죽였다. 죽음의 원한을 품고 돌아온 나는 악연을 베고 복수의 칼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몰랐던 한가지 사실 나는 이 나라 태후의 친딸이란걸… … “세자, 선주와 혼인하고 싶으시다고요?” “그건 안 됩니다. 세자는 원래 지영이와 정혼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놀란 목소리가 대전 안에서 울려 퍼지자 유지영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목소리를 들으니 전생에 그녀와 한 이불을 덮고 살았던 배준형이 분명했다. 준수한 외모에 온화한 성격까지, 그는 경성의 뭇 여인들이 꿈에도 그리는 신랑감이었다. 전생 둘은 유지영의 성년식이 마치자마자 바로 혼약을 정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지금 배준형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유선주와 혼인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유지영은 그 순간 배준형도 회귀했음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또 한 번의 기회가 생긴 지금, 그녀는 저 가식적인 가면을 벗기고 그의 날개를 꺾어 지옥으로 떨어뜨리리라 다짐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유지영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유씨 집안의 적장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생모는 궁중에 계신 서 태후였다. 그동안 유씨 집안이 인주에 거주했던 이유는 태후가 유지영의 출생의 비밀이 알려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전생의 황제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친왕의 자손들 중에서 자질이 높은 자를 골라 태자에 책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배준형은 태후의 간택을 받았다. 그가 잘나서가 아니라 단지 유지영의 부군이기 때문이었다. 유지영은 손뼉을 치며 문지방을 넘어 안으로 들어섰다. “지영이?” 집안의 둘째 며느리인 송씨는 눈시울을 붉히며 유지영을 바라보더니 다가와 난감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사람들 앞에서 송씨는 친딸인 유선주보다 유지영을 더 아끼는 것처럼 연기하며 인자하고 선하다는 명성을 쌓았다. “숙모님.” 유지영은 담담히 손을 빼고는 배준형을 돌아보며 말했다. “조금 전에 세자께서 하신 말씀은 다 들었습니다. 세자께서 선주를 연모하시어 혼인하고 싶다 하셨는데, 숙모님은 어찌하여 굳이 저를 엮는 건가요?” 배준형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와 선주는 서로 연모하는 사이다. 지영이 너는 언니로서 동생을 축복할 줄도 알아야지, 괜한 시기심에 선주를 원망하지 말거라.” 전생에 그는 다른 여인에게 조금만 다정하게 굴어도 시샘하고 불만을 퍼붓는 유지영을 보곤 했다. 처음에는 어린 마음에 신선하고 귀엽다고 느꼈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녀에게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세자들은 모두 자식을 보았는데 홀로 후사를 보지 못하여 경성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지영아, 홧김에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유씨 집안의 적장녀는 너이지 않니. 너도 세자와의 혼인만 손꼽아 기다리는 걸 온 집안이 아는데 선주가 어찌 네 사람을 가로채겠어.” 그 순간 배준형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진 것이 보였다. “가서 둘째 아가씨를 모셔오너라!” 송씨는 속으로는 기뻐하면서도, 겉으로는 성이 난 척 유지영의 자존심을 짓밟고, 모두에게 그녀가 수치심도 모르고 제 것이 아닌 사람을 탐낸다고 전했다. “숙모님!” “제가 언제 정왕 세자와의 혼인을 손꼽아 바란다고 말한 적 있나요? 조금 전에 이미 명확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세자께서 선주를 연모하여 혼인하고 싶으시다는데 그게 저와 대체 무슨 상관이죠?” “지영아, 홧김에라도 그런 말은 하면 안 되지.” “제 거절이 숙모님께는 홧김에 한 말로 들렸나 보군요. 숙모님은 절 수치도 모르는 파렴치한 사람으로 만들 속셈인가요?” 송씨가 흠칫하더니 당황한 눈으로 유지영에게 소리쳤다. “지영아, 어찌 웃어른에게 예의 없이 그런 식으로 말하느냐!” 배준형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훈계하듯 말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세자께서 갑자기 혼약을 바꾸고 싶다 하시니, 지영이가 많이 당황했나 봅니다.” 이때 유선주가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하늘거리는 흰 비단치마를 입은 청순한 얼굴의 단아한 미인이었다. “세자와 어머니를 뵙습니다.” “마침 잘 왔다. 어서 너는 세자와 혼인할 마음이 없다고, 이 혼사는 원래부터 지영이의 것이었다고 말하거라.” 송씨는 일부러 언성을 높이며 근엄한 척 말했다. 유선주는 눈시울을 확 붉히더니 애처롭게 유지영과 배준형을 번갈아 보았다. “어서 말하라는데도! 절대 지영이의 세자비 자리를 빼앗지 않겠다고!” 배준형은 혐오스럽다는 듯이 유지영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네가 무슨 짓을 벌이더라도 난 절대 너와 혼인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마음엔 오로지 선주뿐이야.”
모두가 금욕적인 대장군이라 믿었지만,그는 내게만 집착하는 미친놈이었다. 그의 혼사가 정해지고 도망치던 밤 그가 내 손목을 움켜쥐며 말했다. “어딜 도망치려고? 넌 내 거야.” … 강유영은 치맛자락을 들고서 처마 길을 따라 뒤뜰을 나오고 있었다. 온몸에 퍼진 근육통 때문에 걸음걸이가 다소 어색했다. 좌측 쪽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커다란 손이 뻗어 나와 가늘고 여린 그녀의 허리를 가로챘다. “나다.” 익숙한 감송향이 코끝에 닿자, 강유영은 고개를 들고 자신을 안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높게 솟은 날카로운 콧날과, 윤기가 도는 얇은 입술, 요염하다는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빼어난 이목구비와 가지런하게 틀어 올린 머리, 분명히 얼굴은 귀하게 자란 귀공자인데,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강한 위압감이 풍겼다. 사내의 이름은 조원철. 강유영의 큰 오라버니이자, 변방에서 5년간 나라를 지키다가 반달 전에야 개선가를 울리며 귀경한 대장군이었다. 조원철은 그녀를 놓아주고도 바로 물러서지 않고 시선을 내려 지그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전장에 몸을 담았던 사람이라, 풍기는 위압감이 숨이 막혔다. 그저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는데도 감히 눈을 마주칠 수 없게 만드는 위엄이 느껴졌다. 까만 머리와 대조되는 하얗고 고운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물기를 머금은 두 눈은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그녀는 마치 놀란 토끼마냥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오라버니….” 강유영은 떨리는 가슴을 애써 달래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불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지만 등 뒤에는 차가운 담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조원철은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의 체취가 압도하듯 그녀를 감쌌다. 준수한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길고 풍성한 속눈썹 아래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까지 선명히 볼 수 있었다. 강유영의 마음은 또다시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등을 벽에 바짝 붙였다. 두 손은 무의식적으로 뭔가를 잡고 싶어 안달이 났고, 가슴에서 전해지는 떨림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들고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자꾸만 어젯밤을 떠올리게 했다. 조원철은 말없이 손을 뻗었다. 바짝 긴장한 그녀와는 대조되게, 그는 느긋하게 품에서 백옥 약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오라버니, 뭘 하시려는 건가요?” “약 발라야지.” 조원철은 당연하다는 듯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 그럴 필요까지는….” 강유영은 얼굴이 화끈거려 당장 어디라도 들어가서 숨고 싶었다. 그녀는 당황한 듯, 두 손을 저으며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얇은 천 사이로 전해지는 그의 체온이 뜨거워, 이마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녀와 조원철은 피가 섞인 남매가 아니었다. 강유영이 여덟 살 나던 해, 국공부는 친딸을 찾았다며 조연화를 집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강유영이 누군지는 알려주지 않고 단지 그녀가 강씨라는 것만 전해주었다. 그날 이후로 강유영은 조유영에서 스스로 강유영이 되었다. 그래도 장남인 조원철이 강직하고 공정한 사람이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품이었다. 강유영은 그 덕분에 많은 고초를 면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에게 남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감히 뭔가를 바라지는 못하고 그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멀리서 바라볼 뿐이었다. 어젯밤, 술을 많이 마신 조원철이 걱정되어 직접 끓인 숙취 해소탕을 들고 그를 찾아갔었다. 그런데 술에 취할 대로 취한 조원철이 그녀를 누구로 착각한 것인지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다정한 목소리로 ‘내 사랑’이라 부르며 몸을 밀착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무도 잠 못드는 밤이 이어졌다. 그는 마치 뜨거운 불길처럼 온몸으로 그녀를 감쌌다. 평소의 냉담하고 금욕적인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술에 취한 사람은 정말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동이 틀 때까지 그에게 시달리며 몸이 산산조각 날 것 같은 고통을 겪었다. 강유영은 날이 밝기 전에 쑤시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처소로 돌아와 겨우 치마만 갈아입고 사당으로 향해야 했다. 그녀가 잠깐 넋을 놓은 사이, 허리는 이미 큰 손에 잡혀 있었다. 조원철은 능숙하게 허리띠를 잡아당겨 풀었다.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허리춤이 갑자기 헐렁해지더니 치마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하얗고 보드라운 살결이 드러나고, 곳곳에 남은 붉은 흔적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조원철의 숨결이 거칠어지고 청명하던 눈빛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숙였다. “오라버니….”
“전에 결혼하자고 했던 말, 아직 유효하면 받아들일게요. 우리 결혼해요.” 구청 앞. 오늘은 강이주와 심원후가 미리 약속한 혼인신고 날이었다. 하지만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강이주는 줄곧 그 자리에 있었지만 심원후는 오지 않았다. 혼인신고를 하자고 한 사람은 심원후였고, 약속을 어긴 사람도 심원후였다. 벌써 세 번째였다. 강이주는 손에 들고 있던 대기 번호표들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나서 곧바로 오랜 앙숙인 구기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결혼 제안을 3번 거절했지만 이번에는 강이주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조금 전, 강이주는 SNS에서 한 게시물을 보았다. 심원후의 첫사랑이 올린 글이었다. 사진 속에서 심원후는 단정히 앉아 사과를 깎고 있었고, 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가 필요하기만 하면 언제나 곁에 있어 주는 사람. 이게 바로 일편단심이라는 거겠지. 내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 강이주는 입꼬리를 비틀듯 올리며 댓글을 남겼다. [와, 정말 대단하네요. 그렇게 한결같은 사람은 요즘 보기 드문데… 오래오래 잘 지켜가세요..] 이상하리만큼 강이주의 마음은 차분했다. ‘심원후... 이제 정말 필요 없어.’ 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던 강이주의 생각을 끊었다. [현재 출장 중이라 일주일 후에 돌아갑니다. 그때도 이주 씨의 마음이 같다면, 9시에 구청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강이주는 구기빈 말속에 담긴 뜻을 모를 만큼 둔하지 않았다. “전... 기다릴게요.” 전화를 끊은 뒤, 강이주는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갔다. 강이주가 사는 곳은 도심 한가운데 있는 아파트였다. 텅 빈 공간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녀는 부동산 공인중개사에게 전화를 걸어 집을 매물로 내놓겠다고 연락했다. “네, 최대한 빨리 정리되면 됩니다.” “무슨 집이야?” 등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강이주의 몸이 굳어버렸다. 전화를 끊은 뒤, 강이주는 하루 종일 자취를 감췄던 심원후를 돌아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는 사람이 집을 내놓는다고 해서 잠깐 도와달라고 하길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이주는 심원후의 뒤에 서 있는 백초아를 보았다. 강이주의 시선이 닿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초아의 우울증이 다시 심해졌어. 집에 혼자 두기엔 불안해서 며칠 우리 집에서 지내게 했어. 손님방 좀 정리해.” “이주 씨, 혹시 불편하시면... 제가 그냥 안 오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이주 씨가 별로 내켜 하지 않는 것 같아요.” 백초아의 한마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강이주를 정확히 겨냥했다. 그 모습을 본 심원후의 얼굴이 곧바로 굳어졌다. “기분 상한 티 내는 것도 적당히 해. 초아 상태 안 좋은 거 알면서 SNS에 그런 댓글까지 달아 놓고.” “이 집의 소유권은 나한테도 있어. 누굴 들이든 그건 내 선택이기도 해. 너한테 말한 건 통보지, 네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야.” 강이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말이 연이어 쏟아지는 상황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마음대로 해.” 심원후는 아마 잊고 있을 것이다. 이 집의 명의가 강이주라는 사실을. 하지만 심원후가 백초아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강이주가 반대하는 것도 의미 없었다. 안방으로 돌아온 강이주는 샤워를 마쳤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낮은 대화를 듣고, 심원후가 안방을 백초아에게 내주었다는 걸 알았다. 그들이 같은 침대에 눕는다 해도 강이주는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차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힌 강이주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잠과 깨어 있음의 경계에서 이내 강이주는 따뜻한 품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미안해. 오늘 일부러 안 나간 건 아니야. 초아 상태가 정말 안 좋았어.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어.” “초아에게는 나밖에 없어. 초아를 혼자 두고 올 수가 없었어. 혼인신고는 조금만 미루자. 초아 상태 좋아지면 그때 가서 하면 되잖아.” 백초아 때문에 또다시 혼인신고를 미루자고 했지만, 강이주의 마음은 놀랄 만큼 잔잔했다. “너랑 백초아 일은 내가 상관할 바 아니야. 네가 뭘 하든 네 마음이니까, 나한테 설명 안 해도 돼.” “이주야.” 심원후의 목소리에 불쾌함이 묻어났다. 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강이주는 등을 돌린 자세를 유지한 채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 태도에 심원후는 결국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표정이 굳은 채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밖에서 누군가 급하게 들어오더니 뒤에서 심원후를 꽉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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